조선 중기의 무신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은 28세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장군입니다. 1467년에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벼슬이 올라갔습니다. 이에 남이장군이 지은 북정가(백두산석마도진~)를 알아보겠습니다.
목차
1. 남이 장군(南怡 將軍) 생애
2. 남이장군 북정가(南怡將軍 北征歌)
3. 남이 장군 묘역, 추모비, 동상
1. 남이 장군(南怡 將軍)
남이(南怡)는 조선 전기의 무신입니다. 1441년에 태어나 1468년에 사망했습니다.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직을 역임했으며,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 되고 의산군에 봉해졌습니다. 또한, 건주위 여진을 토벌한 공로로 이등군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해 신숙주, 한명회 등 원상 세력에 의해 구성군, 강순 등 이시애의 난 평정으로 등장한 신세력이 제거될 때 병조판서에서 해직되어 겸사복장으로 밀려났습니다. 이때 그가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엿들은 병조참지 유자광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함으로써 국문 끝에 능지처사당한 비운의 인물로 28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합니다.
그 뒤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습니다. 창녕의 구봉서원,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서울 성동의 충민사에 배향되었습니다. 시호는 충무입니다.
2. 남이장군 북정가(南怡將軍 北征歌)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
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고 칭하리오
후세수칭대장부
서얼 출신 유자광은 남이 장군과 함께 이시애의 난에서 함께 공을 세워서 등용된 사람으로 모사와 계략에 능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세조가 남이 장군을 좋아함을 시기하여 최연소로 올랐던 병조판서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유자광은 죄를 몰아가기 위해서 남이가 지은 북정가의 시 구절을 들고 나옵니다.
시 내용 중 북방정벌 때 쓴 북정가의 셋째 행에서 내용을 바꾸어서 역모죄를 씌우게 됩니다.
男兒二十未平國의 ‘平’ 자를 ‘得(얻을 득)’자로 바꿔서 역모를 꾀했다는 것입니다.
'사나이가 20세에 이르러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고쳐서 일러바쳐 비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역모라고 표현되었으나, 연려실기술에서는 남이의 옥을 날조된 사건으로 명시하고 유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복권 계획이 있었으나 기묘사화 등의 2건의 사화를 겪으면서 남이의 역모는 누명으로 둔갑되었다가 1818년에 관작에 복구됩니다.
유자광은 뒷날 사헌부와 홍문관의 탄핵을 받아 관동으로 귀양 가서 장님이 되어 1512년에 유배지에서 죽었으며, 그의 아들도 북방으로 귀양 가서 그곳에서 사망합니다.
3. 남이 장군 묘역, 추모비, 동상
* 남이 장군 동상 : https://youtu.be/7y8qOKLHprQ
마무리
"난을 진압하고 호기가를 읊었건만... 최연소 병조판서에서 비운의 말로를 맞은 남이 장군."
인생사 새옹지마요, 그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리오, 자기 관리는 스스로 해야 하거늘!
이상으로 남이장군 북정가(南怡將軍 北征歌)를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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